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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5 편 오순절 이후
글쓴이 : 운영자                   날짜 : 2007-08-27 (월) 16:36 조회 : 5725
 

제 195 편   오순절 이후

 

오순절 날 베드로 설교의 결과들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들에서, 대부분 사도들의 장래의 정책들을 정하고 그리고 계획들을 결정하는 그러한 것들이었다, 베드로는 기독교 교회의 실제적 설립자였으며 바울은 기독교 메시지를 이방인들에게 전파하였고, 그리스인 신자들이 그것을 로마 제국 전역에 퍼뜨렸다.

 

전통에 매이고 제사장의 지배를 받는 히브리인들은, 하나의 민족으로서, 하느님의 아버지신분과 사람의 형제신분에 대한 예수의 복음이나 그리스도의 부활과 상승에 대한 베드로와 바울의 선포(후에 기독교가 됨)를 거부하였지만, 로마 제국의 그 나머지는 확장되는 기독교 교훈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당시의 서구 문명은 지적이었고 전쟁에 지쳐 있었으며 기존의 모든 종교들과 우주 철학들에 대하여 속속들이 회의적이었다. 서구 세계의 민족들은, 그리스 문화의 수혜자들, 위대한 과거의 존경 받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철학, 예술, 문학, 그리고 정치적 진보 분야에서 위대한 성취들의 유산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성취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혼을 만족시키는 종교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영적인 갈망은 만족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러한 인간 사회의 무대위로 예수의 가르침들이, 기독교의 메시지에 둘러싸여, 갑자기 밀려왔다. 그렇게 하여 새로운 삶의 체제가 굶주린 가슴의 이 서구 민족들에게 제시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오래된 종교적 관습들과 세상에 대한 예수의 메시지를 새롭게 기독교화(基督敎化)한 각색(脚色) 사이에 즉각적인 갈등을 의미하였다. 그러한 갈등은 새로운 것 혹은 새것의 결정적 승리 또는 어느 정도 선에서 타협으로 끝나야만 한다. 역사는 그 투쟁이 타협으로 끝났던 것을 보여준다. 기독교는 어느 한 민족이 한 두 세대 동안에 동화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은 것들을 포옹시키려고 하였다. 그것은 예수께서 사람들의 혼에게 제시하였던 것과 같은, 단순한 영적 호소가 아니었다. 그것은 일찍부터 종교적 의식(儀式)들, 교육, 마법(魔法), 의술(醫術), 예술, 문학, 법, 정부, 도덕, 성(性)에 관한 규칙, 일부다처제, 그리고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노예제도에 대해서까지 결정적인 자세를 고집하였다. 기독교는 단순히 하나의 새로운 종교 -로마 제국 전체와 동방 세계가 고대하고 있던 어떤 것- 로서가 아니라 사회에 대한 하나의 새로운 질서로 등장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러한 자만으로 그 시대의 사회적, 도덕적 붕괴를 신속히 촉진시켰다. 예수께서 제시하신 그 이상(理想)들은, 그리스 철학에 의해 재해석되고 기독교 속에서 사회화됨으로써, 서구 문명의 윤리 도덕, 종교들 속에 구현되어 있는 인간 종족의 전통들에게 대담하게 도전하였다.

 

처음에는, 기독교는 오직 사회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보다 낮은 계층의 사람들만을 개종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2세기가 시작되면서 그리스, 로마 문화의 최고점이, 삶의 목적과 실재의 목표에 대한 이 새로운 개념인, 기독교 신앙의 이 새로운 질서로 점점 전환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것의 태생의 땅에서는 거의 실패한, 유대에서 기원한 이 새로운 메시지가 그토록 빨리 그리고 효과적으로 로마 제국의 최상의 마음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철학적인 종교들과 신비적인 이교(異敎)들에 대한 기독교의 승리는 다음과 같은 점에 기인되었다.

 

1. 조직. 바울은 위대한 조직가였으며 그의 후예들은 그가 정한 페이스를 유지하였다.

 

2. 기독교가 속속들이 헬라화 되었음. 그리스 철학의 최고에다가 히브리 신학의 정수(精髓)까지도 포옹하였다.

 

3. 그러나 그 중에서 최고는, 그것이 예수의 생명 증여에 대한 반향(反響)과 모든 인류를 위한 그의 구원의 메시지의 반영인, 새롭고 그리고 위대한 이상(理想)을 포함하였다.

 

4. 기독교 지도자들은 그들 신자들의 절반 이상이 안디옥 이교로 전향 된 미드라교와 그러한 타협들을 기꺼이 하려고 하였다.

 

5. 그 다음과 후대의 기독교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로 이교 신앙과 더욱 타협하여, 로마 황제 콘스탄틴마저도 그 새로운 종교에 끌어들어졌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이교도들에게 헬라화 된 바울의 기독교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면서 그들은 이교의 의례적인 허식을 받아들이는 약삭빠른 거래를 이교도들과 하였다. 그들은 미드라 이교와 맺었던 것보다는 이교도들과 더 나은 거래를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초기의 타협에서도 그들은 극심한 부도덕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신비 사상의 비난 받을 만한 다른 수많은 관습들을 성공적으로 제거시킴으로써 정복자 이상의 위치를 차지하였다.

 

현명하게 또는 어리석게, 이 초기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수호하려는 노력 속에서 예수의 이상들과 그리고 더 많은 그의 사상들을 고의적으로 손상시켰다. 그리고 그들은 뛰어나게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오류를 범하지 마라! 이렇게 손상된 주(主)의 이상들은 여전히 그의 복음 속에 잠재되어 있으며, 결국에는 그들의 완전한 힘을 세상에 나타낼 것이다.

 

기독교의 이 이교화(異敎化)로 인하여 옛 질서가 의례적인 본바탕에서 많은 작은 승리들을 이루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다음과 같은 면에서 우세하였다.

 

1. 인간의 도덕에 있어서 훨씬 높고 새로운 견해가 고착되었다.


2. 하느님에 대해서 매우 확대되고 새로운 개념이 세계에 주어졌다.


3. 영원한 삶의 희망이 공인된 종교의 확신의 일부분이 되었다.


4. 사람의 굶주린 혼에게 나사렛 예수가 주어졌다.

 

예수께서 가르치셨던 위대한 진리들 대부분이 이러한 초기의 타협 속에서 거의 유실되었지만, 그것들은 아직도 이교화 된 기독교라는 이 종교 속에서, 그 또한 역시 사람의 아들의 일생과 가르침에 대하여 바울의 각색이었던 것이 잠재되어 있다. 그리고 기독교는, 이교화 되기 이전에 이미 먼저, 속속들이 헬라화 되었다. 기독교는 그리스인들에게 많이, 무척 많이 빚을 지고 있다. 니케아에서 용감하게 일어나서, 그의 증여에 대한 참된 진리가 세상에 알려지지 못할 위기에 처했을 때, 이 회의에 겁 없이 도전함으로써 회의가 예수의 본성에 대한 개념을 감히 가리지 못하도록 한 사람은 이집트에서 온 그리스인이었다. 이 그리스인의 이름은 아타나시우스였으며, 이 신자의 논리와 웅변술이 아니었으면, 아리우스의 설득력이 승리를 거두었을 것이다.

 

1. 그리스인들의 영향

 

기독교의 헬라화는 사도 바울이 아덴에 있는 아레오바고 의회에 출두하여 "알려지지 않은 하느님"에 관하여 아덴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던 의미심장한 그 날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곳에 드리워진 아크로폴리스 성채(城砦)의 그늘 아래에서, 이 로마 시민은 그곳에 있는 그리스인들에게, 갈릴리의 유대 땅에서 발생된 새로운 종교에 대해 그의 각색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리스 철학에는 예수의 가르침들 중에서 많은 것과 유사한 점이 있었다. 그들은 공통적인 목적 -둘 모두 개인의 출현을 추구함- 을 갖고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출현을, 예수께서는 도덕적이고 영적인 출현을, 그리스인들은 정치적인 자유로 인도하는 이성적인 자유주의를 가르쳤으며, 예수께서는 종교적인 자유로 인도하는 영적 자유주의를 가르치셨다. 이 두 개념들은 인간의 자유를 추구하는 하나의 새롭고도 강력한 헌장을 수립하였으며 사람의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영적인 자유에 대한 전조(前條)가 되었다.

 

기독교가 실재하게 되고 투쟁관계에 있는 모든 종교들에 대해서 승리를 거두게 된 두 가지 주요 원인은:

 

1. 그리스 마음은 유대인들로부터라도 새롭고 좋은 사상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했다.

 

2. 바울과 그의 후계자들은 자발적인 그러나 약삭빠르고 영리한 타협자들이었으며 빈틈없는 신학적인 상인(商人)들이었다.

 

바울이 아덴에서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힌 그이"에 대해 설교하면서 일어섰을 때, 그리스인들은 영적으로 굶주려 있었다. 그들은 묻고 있었고, 흥미를 가졌으며, 실제적으로 영적인 진리를 찾고 있었다. 처음에 로마인들은 기독교와 싸웠다, 반면에 그리스인들은 그것을 포옹하였다, 그리고 그때에는 그리스 문화의 일부분인 것으로 수정된, 이 새로운 종교를 로마인들이 나중에 받아들이도록 실제적으로 압력을 가한 사람이 바로 그리스인들이었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라.

 

그리스인들은 미를 숭배하였고, 유대인들은 신성함을 숭배하였다. 그러나 두 민족들은 진리를 사랑하였다. 수세기 동안 그리스인들은 종교를 제외한 모든 인간 문제들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철학적인- 에 대해 진지하게 심사숙고하고 논의하였다. 종교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그리스인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의 종교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수세기 동안 유대인들은 그들의 마음을 종교에 쏟으면서 다른 사고의 분야들에는 무관심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종교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였으며, 도에 지나칠 정도였다. 예수의 메시지의 내용에 의해서 조명(照明)되었을 때, 이 두 민족들의 수세기간의 생각이 결합된 산물은 이제 인간 사회의 새로운 질서에 대한 추진력이 되었으며, 어느 정도는 인간의 종교적 신앙과 관습의 새로운 질서에 대한 추진력이 되었다.

 

그리스 문명의 영향은 알렉산더가 헬라의 문명을 근동 지역에 퍼뜨렸을 때 이미 서부 지중해 지방에 침투해 들어갔다. 그리스인들은 작은 도시국가 체제 속에 사는 동안에는 그들의 종교와 정치로 대단히 잘 하였다. 그러나 마케도니아 왕이 그리스를 담대하게 하나의 제국으로 확대시켜서 아드리아 해로부터 인더스까지 뻗어 나갔을 때 문제가 시작되었다. 그리스의 예술과 철학은 제국의 확대 과업과 완전히 대등하였지만, 그리스의 정치적 운영이나 종교는 그렇지 못하였다. 그리스의 도시국가 체제가 제국으로 확대된 이후에, 상당히 편협한 그들의 하느님들은 다소 괴상하게 보였다. 그리스인들이 한 하느님, 보다 위대하고 훌륭한 한 하느님을 진지하게 찾고 있었다, 그때 오래된 유대 종교의 기독교 화된 이설(異說)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이와 같은 헬라 제국은 지탱될 수 없었다. 그것의 문화적인 동요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서구로부터 제국의 운영을 위하여 로마의 정치적인 재능이 확보된 이후에, 그리고 제국적 권위를 가진 유일신의 종교가 동방으로부터 유입된 이후에서야 그것이 유지되었다.

 

그리스도 이후 첫 세기 동안에, 헬라 문화는 이미 최고 차원에 이르렀다. 그것의 쇠퇴기가 시작되었다. 학문은 발전하고 있었지만 창조적인 재능은 쇠퇴하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때에, 기독교 속에 부분적으로 구현되어 있던, 예수의 사상들과 이상들이 그리스 문화와 학문의 구제에 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알렉산더는 그리스 문명의 문화적 선물을 동방에 부과하였다. 바울은 예수의 복음의 기독교 판(版)으로 서구를 습격하였다. 그리고 그리스 문화가 보급된 서구 전역의 어느 곳이든지, 그곳에는 헬라화된 기독교가 뿌리를 내렸다.

 

예수의 메시지에 대한 동방의 설(說)은, 그의 가르침에 더욱 진실 되게 유지되어 있기는 하였지만, 아브넬의 완고한 태도를 계속해서 따랐다. 헬라 판(版)이 진보한 것처럼 그것은 전혀 진보하지 못하였으며, 결국에는 이슬람 운동 속으로 소멸되어 버렸다.

 

2. 로마의 영향

 

로마인들은 지역별 정부 대신에 대의(代議) 정부를 채택하면서 그리스 문화를 통째로 인수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로마가 모든 서구 세계에 생소한 언어들과 민족들 그리고 심지어는 종교들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용을 가져왔다는 면에서 곧 기독교인에게 혜택을 베풀었다.

 

로마에서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초기 박해의 대부분은, 단지 그들이 설교에서 "왕국"이라는 용어의 불행한 사용에 기인되었다. 로마인들은 어떤 그리고 모든 종교들에 대해서 관대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경쟁의 냄새가 나는 것에 대해서는 대단히 분개하였다. 그러므로 대부분이 오해로 인하여 기인되었던 이러한 초기의 박해가 끝나게 되자, 종교적인 선전 활동의 장(場)이 활짝 열렸다. 로마인은 정치적인 운영에 흥미를 가졌다. 그는 예술이나 종교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 두 가지에 대해서는 이상스러울 만큼 관대하였다.

 

동방의 법은 엄격하고 독단적이었고, 그리스의 법은 유동적이고 예술적이었으며, 로마의 법은 위엄이 있고 존경심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로마의 교육은 전대미문의 무조건적인 충성을 가르쳤다. 초기의 로마인들은 정치적으로 헌신적이고 초연하게 정화된 개인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상에 대해 성실하고 열정적이었으며 헌신적이었다. 그러나 이름에 걸 맞는 종교가 없었다. 그들의 그리스인 선생들이 그들에게 바울의 기독교를 받아들이도록 설득 한 것은 작은 놀라움이다.

 

그리고 이 로마인들은 아주 훌륭한 민족이었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를 다스렸기 때문에 서구 전역을 다스릴 수 있었다. 그러한 미증유(未曾有)의 성실성, 헌신 그리고 충실한 자아-제어는 기독교가 받아들여지고 성장하는 데에 이상적인 토양이었다.

 

이 그리스-로마인들은 정치적으로 국가에 헌신하였었기 때문에, 제도적인 교회에 영적으로 헌신하게 되는 것이 쉬웠다. 로마인들은 교회가 국가에 대한 경쟁자로서 그들이 두려워했을 때에만 교회와 싸웠다. 로마는, 국가적인 철학이나 본래의 문화가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 문화를 자기 것으로 취하였으며, 그리스도를 그것의 도덕적인 철학으로 대담하게 받아들였다. 기독교는 로마의 도덕적인 문화가 되었지만, 도매 방식으로 새로운 종교를 포옹한 사람들의 영적 성장의 개인적인 경험 면에서 거의 그것의 종교가 될 수 없었다. 사실 정말로, 많은 개인들이 모든 이 국가 종교의 표피 밑을 파고 들어갔으며, 그들 혼의 자양분 공급을 위하여 헬라화되고 이교화된 기독교의 잠재된 진리들 속에 들어있는 감추어진 의미들의 참된 가치들을 발견하였다.

 

스토아 철학적이고 "본성과 의식"에 대한 기운찬 매혹은, 적어도 지적인 감각 면에서, 모든 로마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도록 잘 준비를 하였을 뿐이다. 로마인은 본성적으로 그리고 훈련에 의하여 법률가였다. 그는 자연의 법칙들까지도 경외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기독교 안에서, 자연의 법칙들 속에서 하느님의 법칙들을 식별했다. 키케로와 버질을 낳을 수 있었던 민족은 바울의 헬라화된 기독교를 위하여 무르익었다.

 

그리하여 로마와 된 이 그리스인들은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 양쪽에 그들의 종교를 철학화 하고, 그것의 사상들을 통합하고 그것의 이상들을 조직화시키고, 기존의 현재 생활 속에 종교적인 관습들을 적응시키도록 힘을 가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일들은 히브리어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함으로써, 그리고 나중에 그리스어로 신약 성경이 기록됨으로써 막대한 도움을 받았다.

 

그리스인들은, 유대인들이나 다른 많은 민족들과는 대조적으로, 오랫동안 잠정적으로 불멸, 죽음 이후의 어느 종류의 생존을 믿어왔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이었기 때문에, 그 기독교가 그들에게 강력하게 호소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리스의 문화적 그리고 로마의 정치적 승리들의 상속은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문화로 지중해 땅들을 하나의 제국으로 통합시켰다, 그리고 서구 세계를 하나의 하느님을 위하여 준비시켰다. 유대교가 이 하느님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유대교는 로마 화된 이 그리스인들에게 종교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필로가 그들의 거부감을 완화시키는 것을 좀 도왔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의 하느님에 대한 더 좋은 개념을 그들에게 보여주었으며, 그들은 준비된 듯이 그것을 포옹하였다,

 

3.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에서

 

로마의 정치적인 통치가 강화된 후, 그리고 기독교가 전파된 후에, 기독교인들은 위대한 종교적 개념인 유일신 하느님이 그들에게 있지만, 그러나 제국이 없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스-로마인들은 그들에게 위대한 제국은 있지만, 제국적 경배와 영적 통일에 합당한 종교적 개념으로서 섬길 수 있는 신(神)이 없음을 발견하였다. 기독교인들은 제국을 받아들였고 제국은 기독교를 수용하였다. 로마는 정치적 통치의 합일을 제공하였고 그리스는 문화와 학문의 합일을 제공하였으며, 기독교는 종교적 사고와 관습의 합일을 제공하였다.

 

로마는 제국의 보편주의로서 국수주의(國粹主義)의 전통을 극복하였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서로 다른 종족들과 국가들이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하나의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기독교는 로마에서 스토아 철학자의 활기 찬 가르침들과 신비주의 이교들의 구원의 약속들 사이에 큰 논쟁이 벌어졌을 때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들의 언어 속에 "비이기심(非利己心)" 이라는 단어가 없는 영적으로 굶주린 민족에게, 기독교는 상쾌한 위로와 해방의 힘으로 다가왔다.

 

기독교에 가장 큰 힘을 준 것은 그 신자들이 봉사의 삶을 살았던 방법과 그리고 더욱이 격렬한 박해의 초기에 신앙을 위하여 그들이 죽어갔던 처세의 길이었다.

 

그리스도의 어린이 사랑에 대한 가르침은 그들을 원하지 않았을 때, 특히 여자 아기들을, 어린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널리 퍼진 관습을 곧 종식시켰다.

 

기독교 경배의 초기 방식은 대부분이 유대인 회당에서 받아 왔으며, 미드라신 경배의 의식에 의해 수정되었다 나중에, 많은 이교도의 허식이 더해졌다. 초기 기독교 교회의 근간은 유대교로 개종한 기독교화 된 그리스인들로 구성되었다.

 

그리스도 이후 제 2 세기(世紀)는 세계의 전체 역사 중에서 좋은 종교가 서구 세계에서 발전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시기였다. 제 1 세기 동안 기독교는 몸부림과 타협으로 뿌리를 내릴 준비를 하였으며 급속히 퍼져나갔다. 기독교는 제국을 받아들였고 제국은 후에 기독교를 수용하였다. 이것은 새로운 종교의 전파를 위하여 위대한 시기였다. 종교적인 자유가 있었고 여행이 보편화되었으며 사상은 속박을 받지 않았다.


이미 시작된 도덕적 타락을 막거나 또는 이미 확정되고 확장되고 있는 인종 퇴보를 보상하기에 헬라화 된 기독교를 만족스럽게 받아들이는 영적인 자극이 로마에 너무 늦게 임하였다. 이 새로운 종교는 제국화된 로마를 위한 문화적인 필수품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보다 큰 의미에서 영적 구원의 수단이 되지 못한 것은 매우 불행하다.

 

아무리 훌륭한 종교라도 정부의 업무에 대한 개인 참여 부족의 당연한 결과들로부터, 과도한 온정주의로부터, 과중한 세금과 총체적 징수 폐해, 금을 고갈시키는 레반트족과의 불균형한 거래, 오락의 광기, 로마의 규격화, 여성의 타락, 노예와 민족의 타락, 육체적인 전염병, 그리고 영적인 불모지에 가까울 정도로 제도화된 국가 교회로부터 거대한 제국을 구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알렉산드리아의 상황은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다. 초기의 학교들은 손상되지 않은 많은 예수의 가르침들을 지켜 나갔다. 판테누스는 클레멘트를 가르친 후에 인도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로 나다니엘을 따라 갔다. 기독교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예수의 이상들 중 일부분이 희생된 반면에, 제 2 세기 말경에. 실제적으로 그리스-로마 세계의 모든 위대한 마음의 소유자들은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은 매우 공정하게 기록되어야 한다. 승리는 완성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리고 로마 제국이 몰락한 이후에도 기독교는 생존을 보장 받기에 충분할 만큼, 그 제국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만일 받아들여진 것이 헬라적 기독교 대신에 천국 복음이었다면 로마와 전 세계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 지를 종종 추측해보곤 한다.

 

4. 유럽의 암흑기

 

사회의 부속물이 되고 정치와 동맹자가 된 교회는 소위 유럽의 "암흑기"라고 불리는 지성과 영적인 퇴보에 동참하도록 운명지어졌다, 이 기간 동안, 종교는 점점 더 세상과 격리되고, 고행 생활화하였고, 율법화 되었다. 영적인 면에서, 기독교는 동면(冬眠)하고 있었다. 이 기간에 두루, 이러한 무기력하고 세속화된 종교에 발맞추어서, 신비주의의 계속적인 흐름, 비현실성의 가장자리에서 철학적으로는 범신론과 비슷한 환상적인 영적 경험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어둡고 절망적인 세기들 동안, 사실상 종교는 다시 중고품이 되었다. 교회의 뒤덮는 권위와 전통과 지시 앞에서 개인의 존재는 거의 없어졌다. 신성한 재판정에 계신 하느님들에게, 만일 효과적으로 호소하려면. 하느님들 앞에 사람으로서 탄원할 수 있어야 하는, 그러므로 특별한 영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성자" 집단의 창조라는 새로운 영적인 위협이 나타났다.

 

그러나 기독교는 충분히 사회화되고 이교화 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가오는 암흑기를 막아내기에는 무기력하였던 반면에, 이러한 오랜 기간의 도덕적 어둠과 영적 침체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보다 잘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서구 문명의 긴 밤이 지나는 동안 존속되었으며, 문예부흥이 밝아온 세계에서도 여전히 도덕적인 영향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암흑기가 지남을 뒤따라 일어난 기독교의 재건은 특별한 지적, 감정적, 그리고 인간 품성의 영적 유형에 적합한 여러 분파들의 기독교적 가르침과 믿음을 초래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 많은 이러한 특별한 기독교인 집단들, 또는 종교적 가계(家系)들이 이 발표를 하고 있는 시간에도 아직 잔존(殘存)하고 있다.

 

기독교는 예수의 종교가 예수에 대한 종교로 비의도적으로 변환되어 기원된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더 나아가서 헬라화, 이교화, 세속화, 제도화, 지적 퇴보, 영적 타락, 도덕적 동면, 위협 받은 종식, 후반기의 회복, 분열, 그리고 가장 최근에 상대적(相對的)으로 재건되는 경험을 가진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유래는 타고난 생명력과, 강한 회복력을 가진 자원들의 소유를 암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기독교는 현재 서구 문명 세계 속에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의 지난 싸움들이 우위(優位)를 지키기 위한 것으로 특징 지워지는 그 중대한 위기들보다 훨씬 더 험악한, 실재를 위한 투쟁에 대면하고 있다.

 

종교는 이제 새로운 시대의 과학적 마음과 유물론적 성향들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세속적 종교와 영적 종교 사이의 거대한 투쟁 속에서, 예수의 종교는 결국에는 승리를 거둘 것이다.

 

5. 현대의 문제점

 

20세기는 기독교와 다른 모든 종교들이 풀어야 할 새로운 문제들을 야기하였다. 문명이 고도화(高度化)될수록, 사회를 안정시키고 그것의 물질적(物質的)인 문제들을 용이하게 해결하려는 사람의 모든 노력 속에서 "하늘의 실체들을 먼저 찾아야 하는" 의무가 더욱 긴급하게 대두된다.

 

진리는 분할되고, 격리되고, 고립되고, 너무 심하게 분석될 때, 혼돈되고 그리고 오도(誤導)되기까지 한다. 살아있는 진리는 전체로 그리고, 물질적 과학의 사실이나 중재하는 기술의 영감으로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영적 실체로 포옹될 때에만 진리를 찾는 자들을 바르게 가르친다.

 

종교는 사람에게 그의 신성하고 영원한 운명의 계시이다. 종교는 순전히 개인적이고 영적인 경험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사람의 다른 높은 사고 형태와 영원히 구별되어야만 한다.


1. 물질적 실체의 사물들에 대한 사람의 논리적인 태도.


2. 추함과 대비된 아름다움에 대한 사람의 심미적인 감상.


3. 사회적인 의무들과 정치적인 임무에 대한 사람의 윤리적 인지(認知).


4. 인간 도덕에 대한 사람의 감각조차도 기원적으로 그리고 저절로 종교적인 것이 아니다.


종교는 신앙과 신뢰 그리고 확신을 불러내는 가치들을 우주에서 발견하도록 예정되었다. 종교는 경배 속에서 절정을 이룬다. 종교는 마음에 의하여 발견된 상대적 가치들과는 대조가 되는 이러한 최극의 가치들을 혼을 위하여 발견한다. 그러한 초인간적 통찰력은 참된 종교적 경험을 통해서만 소유될 수 있다.

 

영적 실체들에 입각한 도덕이 없이 지속되는 사회체제는 중력 없는 태양계가 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호기심을 만족시키려고 또는 육신으로 한번의 짧은 생(生)에서 혼속에 밀려오는 모든 잠재된 모험을 만족시키려고 노력하지 마라. 인내하라! 저속하고 비열한 모험에 불법적으로 뛰어드는 탐닉에 유혹되지 마라. 너의 에너지들에 마구를 채우고 너의 정열들에 굴레를 씌워라. 진보적인모험과 감동적인 발견의 끝없는 생애가 장엄하게 전개되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침착하여라.

 

사람의 기원에 대한 혼동으로 그의 영원한 운명을 잊어버리지 마라. 예수께서 어린아이들 까지도 사랑하셨던 것과, 인간 품성의 위대한 가치를 영원히 분명하게 하신 것을 잊지 마라.

 

너희가 세상을 바라볼 때, 너희가 보는 악의 검은 조각들은 궁극적 선의 하얀 바탕에 대비하여 보인다는 것을 기억해라. 너는 그저 악의 검은 바탕에 대비하여 초라하게 나타나는 선의 흰 조각들만을 보지 마라.

 

널리 알리고 그리고 전파해야 할 그렇게 많은 진리가 있는 때, 왜 사람들은 단지 그것이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고 하여 세상에서 악에 그렇게 많이 유의해야만 하는가? 진리의 영적 가치들의 아름다움은 악의 현상보다 더욱 즐겁고 고양하는 것이다.

 

종교에서, 현대 과학이 실험 기법을 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경험의 방법을 옹호하고 따르셨다. 우리는 영적 통찰력의 인도를 따라서 하느님을 발견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름다운 것에 대한 사랑, 진리의 추구, 의무에 충실함, 그리고 신성한 선에 대한 경배를 통하여 이 혼의 통찰력에 도달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가치 기준 중에서, 사랑이 참된 통찰력으로의 진실한 안내자이다.

 

6. 유물론

 

과학자들은 부지불식간에 인류를 유물론적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들은 그 시대들의 도덕의 제방 위에서 아무 생각 없이 달리기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인간 경험의 제방은 광대한 영적 자원들을 갖고 있다. 그것은 그것에게 요구된 수요들을 대처할 수 있다, 오직 생각 없는 사람들만이 인간 종족의 영적 자산들에 대해여 전전긍긍한다. 유물론적-세속적 공포가 끝났을 때, 예수의 종교가 파산되지 않았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천국의 영적 제방은 "그의 이름으로" 그것에게 구하였던 모든 사람들에게 신앙과 소망 그리고 도덕적 안심으로 갚아줄 것이다.

 

유물론과 예수의 가르침 사이에 어떤 명백한 충돌이 있던지 간에, 너희는 앞으로 다가오는 시대에 주(主)의 가르침이 완전히 승리할 것을 안심하고 있어도 된다. 실제로, 참된 종교는 과학과의 어떤 논쟁에도 휘말리게 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물질적인 것에 관여하지 않는다. 종교는 과학에 대해 단순히 무관심하지만 서로 교감을 한다. 한편 그것은 과학자들과는 최극으로 관계를 한다.

 

지혜의 부수적(附隨的) 해석과 종교적 경험의 영적 통찰력이 없는 단순한 지식 추구는 결국에는 염세주의와 인간 절망으로 인도한다. 작은 지식은 정말로 혼란스럽다.

 

이것을 쓰고 있는 시기에, 유물론적 시대의 최악은 지나갔다. 보다 증진된 납득의 날이 이미 밝기 시작하였다. 과학적 세계의 더 높은 차원의 마음을 소유한 사람들은 그들의 철학에서 더 이상 전적으로 유물론적이 아니다, 그러나 필부들은 이전의 가르침들로 인하여 여전히 그 방향으로 기울어져있다. 그러나 이러한 형이하학적 실재론의 시대는 이 세상의 사람의 삶 속에서 지나가는 이야기에 불과할 뿐이다. 현대 과학은 참 종교 -그의 신자들의 삶 속에 해석된 예수의 가르침들- 를 언급하지 않고 남겨 놓았다. 과학이 했던 모든 일은 삶을 잘못 해석한 유치한 환상을 깨뜨렸을 뿐이다.

 

이 세상에서의 사람의 삶에 대하여, 과학은 양적인 경험이며, 종교는 질적인 경험이다. 과학은 현상을 취급한다. 종교는 기원과 가치 그리고 목표를 취급한다. 인(因)들을 물리적 현상의 설명으로 돌리는 것은 궁극에 대한 무지를 고백하는 것이며 결국에는 과학자들을 곧바로 위대한 조물주 -낙원의 우주 아버지- 로 돌아가도록 인도할 뿐이다.

 

기적들의 시대로부터 기계들의 시대로의 극단의 방향 전환은 모두 사람을 당황하게 하였다. 기계론의 그릇된 철학들의 교묘함과 민첩함은 바로 그들의 기계론적 논쟁들이 거짓임을 드러낸다. 유물론자 마음의 숙명론적인 민첩함은 우주는 맹목적이고 무의미한 에너지 현상이라는 그의 주장들을 영원히 반증한다.

 

상당한 교육을 받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기계론적 자연주의와, 길거리에 보통사람의 경솔한 세속주의는 둘 모두 오로지 물질에만 관심을 둔다. 그들에게는 모든 참된 가치들, 제재규약, 그리고 영적 본성의 만족감이 없는데다가, 신앙과 소망 그리고 영원한 확신이 결여되어 있다. 현대의 삶에서 커다란 문제들 중의 하나는 그가 너무 바빠서 영적인 명상과 종교적인 헌신을 할 수 없다고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다.

 

유물론은 사람을 혼이 없는 자동인형으로 변화시키며, 낭만적이지 못하고 유물론적인 우주의 수리적인 공식에 무기력한 위치를 차지하는 단지 산수 기호로 그를 구성한다. 그러나 수학의 이 모든 광대한 우주는 주(主) 수학자가 없이 어디에서 오는가? 과학은 질량의 보존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지만, 종교는 사람들의 혼의 보존을 유효하게 한다. 그것은 영적 실체들과 영원한 가치들과의 그들의 경험에 관계한다.

 

오늘날의 유물론적 사회학자들은 공동체를 조사하고, 그 후 즉시 보고서를 작성하며, 그가 그들을 발견했던 대로 사람을 내버려둔다. 1,900년 전에, 배움이 없는 갈릴리인들은 사람의 내적 경험에 영적 기여로서 그의 생명을 주시는 예수를 조사하였고, 그 후에는 밖으로 퍼져 나갔으며, 로마 제국 전체를 뒤집어버렸었다.

 

그러나 종교적 지도자들은 중세 시대의 나팔소리로 현대인들을 영적 전쟁터로 불러내려고 시도하는 큰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종교는 새로운 최첨단의 표어들을 준비해야만 한다.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정치적 만병통치약이라도 영적인 진보를 대신하지 못할 것이다. 잘못된 종교들은 실체의 기피를 묘사하지만, 예수께서는 그의 복음에서 필사자 사람을 영적인 진보의 영원한 실체로 들어가는 바로 그 입구로 선도하셨다.

 

마음이 물질로부터 "발생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만약에 우주가 단지 기능구조이고 마음이 물질과 구별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관찰된 어떤 현상에 대해서 다른 두 개의 해석들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진리와 아름다움 그리고 선(善)에 대한 개념들은 물리학이나 화학의 고유한 속성이 아니다. 기계는 진리, 옳은 것에 대한 굶주림, 그리고 선의 소중함에 대해 알 수 없고, 매우 조금 안다.

 

과학은 물리적일 수 있지만, 진리를 식별하는 과학자의 마음은 동시에 초물질적(超物質的)이다. 물질은 진리를 모른다, 그것은 자비를 사랑하거나 영적 실체들로 즐길 수도 없다. 영적인 계몽에 기초되고 인간 경험에 뿌리를 둔 도덕적 신념들은 물리적 관찰들에 기초한 수학적 추론들과 같이 실제적이며 확실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그리고 더 높은 차원에 근거한다.

 

만약에 사람들이 단지 기계들이라면, 물질적인 우주에 대해 거의 동일하게 반응 할 것이다. 개체성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며, 품성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둘째 근원이며 중심의 분별불가적인 의지 앞에서, 우주들의 우주의 중심에 있는 낙원의 절대적인 기능구조에 대한 사실은 결정자들이 우주의 배타적인 법이 아니라는 것을 영원토록 확실하게 한다. 유물론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배타적이 아니다. 기능구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분별불가적이 아니다. 결정론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독이 아니다.

 

물질의 유한한 우주는 마음과 영의 연합된 존재가 없었다면 결국에는 균일하고 결정론적이 되었을 것이다. 조화우주 마음의 영향은 물질적인 세계 속으로도 계속해서 자발성을 주입한다.

 

실재의 어느 영역에서도 자유 또는 진취성은 영적 영향과 조화우주-마음 통제 정도에 정비례한다. 그것은 인간 경험 속에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실제성의 정도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일단 하느님을 발견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이미 너희를 발견하셨다는 것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인 것이다.

 

선(善)과 아름다움 그리고 진리에 대한 진지한 추구는 하느님께로 인도한다. 그리고 모든 과학적 발견은 우주 속에 자유와 균일성이 둘 모두 실재하고 있음을 명시한다. 발견자는 발견하는 것에 자유로웠다. 발견된 사물은 실제이고 명백히 균일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물로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7. 유물론의 취약점

 

물질적 마음을 가진 사람이 유물론적 우주의 이론들과 같이 취약한 이론들로 하여금 그에게서 참된 종교의 개인적 경험의 광대한 영적 자원들을 빼앗아 가도록 허용하는 것이 얼마니 어리석은 것인가. 사실들은 결코 참된 영적 신앙과 다투지 않는다. 이론들은 그럴 수 있다. 과학은 종교적인 신앙  -영적 실체들과 신성한 가치들에 대한 인간의 믿음- 을 전복시키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오히려 미신을 타파하는데 전념하는 것이 좋다.

 

종교가 사람을 위하여 영적으로 하는, 삶의 지평을 넓히고 그의 품성을 증대시키는 것을 과학은 그를 위하여 물질적으로 해야 한다. 참된 과학은 참된 종교와 계속되는 대립관계를 가질 수 없다. "과학적인 방법"은 단지 물질적인 모험들과 물리적인 성취들을 재는 지적 척도이다. 그러나 물질적이고 전적으로 지적인 것임으로, 그것은 영적 실체들과 종교적 경험들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전혀 쓸모가 없다.

 

현대 유물론자의 모순은 다음과 같다. 만약 이것이 단지 물질적 우주이고 사람은 단지 기계이라면, 그러한 사람은 그 자신을 그런 기계로 인식하는 것이 절대로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그런 기계-사람은 그러한 물질적 우주의 실재 사실을 결코 의식할 수 없을 것이다. 기계론적 과학의 유물론적 혼란과 절망은 바로 그의 초 물질적 통찰력이 유물론적 우주에 대한 잘못된 판단과 자가당착의 개념들을 형성한 과학자의 영이 내주 하는 마음의 사실을 인지하는데 실패하였다.

 

영원과 무한의, 진리, 아름다움의, 그리고 선에 대한 낙원 가치들은 시-공간(時-空間) 우주들 현상의 사실들 속에 숨겨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러한 영적 가치들을 감지하고 분간할 수 있는, 영으로 태어난 사람의 신앙의 눈이 필요하다.

 

영적 진보의 실체들과 가치들은 단순히 물질적 마음이 영화롭게 꾸민 백일몽-어떤 "심리적 투영"이 아니다. 그러한 것들은 너희 안에 내주하는 조절자, 사람의 마음 안에서 살고 있는 하느님 영의 영적 예측이다. 그리고 "상대성"을 발견해 내는 어렴풋한 이해와 가벼운 접근으로 하느님의 영원함과 무한함에 대한 너희 개념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라. 그리고 그 모든 자아 표현의 필요성과 관련되는 너희의 간절한 탐구가 너의 참되고 더욱 네 자신인, 조절자 표현을 위한 준비에서 실패를 가져오는 오류를 범하지 마라.

 

만약 이것이 단지 물질적 우주이었다면, 물질적 사람은 결코 그러한 배타적으로 물질적인 실재의 기계론적 성격의 개념에 도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우주의 기계론적 개념 그 자체가 마음의 비물질적 현상이며, 모든 마음은, 비록 그것이 아무리 속속들이 물질적으로 제약을 받고 기계적으로 통제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비물질적인 기원이다.

 

부분적으로 진화된 필사자 사람의 정신적 기능구조는 일관성과 지혜를 충분하게 부여 받지 않았다. 사람의 자부심은 종종 그의 이성(理性)을 지나치고 그리고 그의 논리를 벗어난다.


가장 비관적인 유물론자의 바로 그 비관주의는, 자체적으로 그리고 저절로, 비관주의자의 우주가 전적으로 물질적이 아니라는 충분한 증명이다. 낙관주의와 비관주의는 둘 모두 사실들은 물론 가치들에 대한 마음의 의식에서 개념의 반작용들이다. 만일 우주가 정말로 유물론자들이 그것이 그러하다고 간주하는 것이었다면, 그러면 인간 기계로서의 사람은 바로 그 사실에 대한 모든 의식적(意識的) 자각이 결여되어 있어야만 한다. 영으로 태어난 마음속에 가치들의 개념의 인식이 없다면, 우주 유물론의 사실과 우주 운행의 기계론적 현상은 절대로 사람에 의해 감지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의 기계는 다른 기계의 본성이나 가치를 인식할 수 없다.

 

과학은 오직 물질들과 사실들만을 인지하고 취급하기 때문에 생명과 우주에 대한 유물론적 철학이 과학적일 수 없다. 철학은 필연적으로 초 과학적이다. 사람은 자연의 물질적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생명은 자연의 물질적 차원들을 초월하는 현상이며, 그 속에서 마음의 통제 속성들과 영의 창조적 본질특성을 나타낸다.

 

유물론자가 되려는 사람의 진지한 노력은, 지적 그리고 도덕적 자살을 저지르려고 헛되이 노력하는 그 사람의 비극적인 현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만일 우주가 오직 물질적이고 그리고 사람이 단지 기계이었다면, 과학자들에게 우주의 기계화에 대한 가정을 세우도록 용기를 주는 과학이 없었을 것이다. 기계들은 측정하거나 구분하거나 또는 스스로를 평가할 수 없다. 그러한 과학적 작업은 초기계적 지위의 실존개체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

 

만약에 우주 실체가 단지 하나의 거대한 기계이라면, 사람은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그리고 그러한 평가의 통찰력을 의식하기 위하여 우주 밖에 있어야만 하며 그것으로부터 떨어져 있어야만 한다.

 

만약에 사람이 단지 기계이라면, 도대체 어떤 기법으로 이 사람이 그는 단지 기계이다. 라는 것을 믿게 되었고 또는 안다고 주장하는가? 그 자신의 자아-의식 평가의 경험은 단지 기계의 속성이 결코 아니다. 자아-의식이 있고 공인된 기계론자가 기계론에 대한 가능한 최선의 대답이다. 만약에 유물론이 사실이었다면, 자아-의식이 있는 기계론자는 없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비도덕적인 행동을 할 수 있기 전에 그 사람이 먼저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도 역시 맞는 말이다.

 

유물론의 바로 그 주장이 그러한 신조들을 주장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마음의 초 물질적 의식을 의미한다. 기계론은 타락할 수는 있지만, 결코 진보할 수는 없다. 기능구조들은 생각하거나, 창조하거나, 꿈을 꾸거나, 포부를 가지거나, 이상화하거나, 진리에 굶주리거나, 또는 올바름에 목마를 수 없다. 그것들은 다른 기계들을 섬기도록 그리고 그들의 영원한 진보의 목표로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와 같이 되려고 분투하는 숭고한 과업을 선택하도록 열정으로 그들의 삶을 자극하지 않는다. 기계들은 결코 지적이거나, 감정적이거나, 심미적이거나,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이거나, 또는 영적이 아니다.


예술은 사람이 유물론적이 아님을 증명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영적으로 불멸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다. 예술은 필사자의 모론시아이며, 사람, 물질적인 것, 그리고 사람, 영적인 것 사이에 개재(介在)되는 분야이다. 시(詩)는 물질적 실체들로부터 영적 가치들로 도피하려는 노력이다.

 

고차원의 문명에서는, 예술은 과학을 인간화 시키고, 반면에 그것은 진실한 종교 -영적이고 영원한 가치들에 대한 통찰- 에 의해 영화(靈化)된다. 예술은 인간과 실체의 시-공간적인 평가를 묘사한다. 종교는 조화우주 가치들의 신성한 포옹이다. 그리고 영적 상승과 확대로 영원한 진보를 내포한다. 시간의 예술은 영원이 시간의 실체 그림자들로서 반영하는 신성한 원형틀들의 영적 표준들에 장님이 될 때에만 위험하다. 참된 예술은 삶의 물질적인 사물들에 대한 효과적인 처리이며 종교는 삶의 물질적인 사실들의 고상한 변환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술에 대한 그것의 영적 평가를 그치지 않는다.

 

자동 장치가 자동 현상의 철학을 생각해 낼 수 있다고 추정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며, 그리고 그것이 다른 것과 동류의 자동 장치들의 개념을 형성한다고 추정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과학자에게 정당한 인정이 고려되지 않으면 물질 우주에 대한 어떤 과학적 해석도 무가치하다. 예술가를 인정해주지 않으면 그 예술의 감상은 참된 것이 아니다. 도덕주의 자를 포함하지 않는다면, 도덕에 대한 어떤 평가도 보람이 없다. 철학자를 무시한다면, 철학의 인식이 덕성을 북돋우지 못한다, 그리고 종교는 종교가의 참된 경험 -바로 이 경험 속에서 그리고 경험을 통하여 종교가는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를 알려고 노력하는- 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주들의 우주는 그것을 만드셨고 그것을 끊임없이 관리하시는 무한한 하느님인 "스스로 이신 이"로부터 떨어진 의미 없는 우주는 존재할 수 없다.

 

유물론자들 -인본주의자들- 은 물질적 흐름들과 표류하는 경향이 있다. 이상주의자들과 영을 추구하는 자들은 에너지 흐름들의 명백히 순수한 물질적 진로를 수정하기 위하여 지성과 활력으로 그들의 노를 감히 사용하려고 한다.

 

과학은 마음의 수학으로 산다. 음악은 감정들의 박자를 표현한다. 종교는 무한자의 더 높고 영원한 선율의 측정들과 시간 공간의 조화에서 혼의 영적 리듬이다. 종교적인 경험은 인간의 삶 속에서 진실로 초 수학적인 그 무엇이다.

 

언어에서, 알파벳은 유물론의 기능구조를 표현한다. 반면에 수많은 사고들, 커다란 사상들, 그리고 고상한 이상들 -사랑과 미움의, 비겁함과 용기의- 의 의미를 표현하는 말들은, 물질적이며 동시에 영적인 법칙에 의해 한정되고, 품성의 의지가 주장하는 바에 의해 지시를 받으며, 그리고 타고난 상황적 자질에 의해서 제한을 받는 범위 안에서 마음의 작용들을 묘사한다.

 

우주는 과학자가 발견하는 그리고 그가 과학이라고 여기게 되는 법칙, 기능구조 그리고 균일성 같은 것이 아니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우주 현상을 관찰하고 그리고 창조의 물질측면의 그 구조적 위상에 선천적으로 들어있는 수학적 사실을 분류해 내는 그러한 호기심이 강하고, 생각하고, 선택하고, 창조적이고, 병합하고 그리고 분간해 내는 그 과학자들과 같다. 또한 우주는 예술가의 예술과는 다르다, 그러나 오히려 영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노력으로 물질적 사물들의 세계를 초월하려고 애쓰는, 분투하고, 꿈꾸며, 열망하고, 전진하는 예술가와 같다.

 

과학자는, 과학이 아니고, 에너지와 물질의 진화하고 진보하는 우주의 실체를 감지한다. 예술가는, 예술이 아니고, 물질적 실재와 영적 자유 사이에 개재하는 과도기 모론시아 세계의 실재를 명시한다. 종교가가, 종교가 아니고, 영원한 진보 속에서 마주치게 되는 영적 실체들과 신성한 가치들의 실재를 증명한다.

 

8. 세속적인 전체주의

 

그러나 유물론과 기계론이 대개 사라진 후에도, 20세기 세속주의의 압도적인 영향은, 수백만의 의심 없는 사람들의 영적 경험들을 아직 시들게 할 것이다.

 

현대 세속주의는 두 가지의 세계적인 영향들에 의해 촉진되었다. 세속주의의 아버지는 소위 과학, 무신론적 과학이라고 하는 19세기와 20세기의 편협하고 무신론적(無神論的)인 태도였다. 현대 세속주의의 어머니는 전체주의적 중세(中世) 기독교 교회였다. 세속주의는 제도화된 기독교 교회에 의한 서구 문명의 거의 완벽한 지배에 대항하여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발단이 되었다.

 

이 계시의 시기에, 유럽과 아메리카의 생활에서 유행하는 지적 그리고 철학적 풍조는 단연코 세속적-인본주의적이다. 서구의 사고(思考)는 300년 동안 점차적으로 세속화되어 왔다. 종교는 점점 더 명목상의 영향력, 주로 의식적(儀式的)인 행사가 되었다, 서구 문명의 자칭 기독교인들의 대부분은 무의식중에 실제 세속주의자이다.

 

전체주의적 교회 지배의 쇠퇴하는 장악으로부터 서구 사람들의 사고와 생활을 해방시키는 것은 커다란 힘, 강력한 영향력을 필요로 하였다. 세속주의는 교회의 속박을 깨트렸다. 그러나 이제는 다음 차례로 그것이 현대인들의 가슴과 마음 위에 새롭고 그리고 무신론적 유형의 지배를 확립하려고 위협한다. 전제 군주적 그리고 독재적인 정치 형태는 과학적 유물론과 철학적 세속주의의 직접적인 산물이다. 세속주의는 제도화된 교회의 지배로부터 사람을 자유롭게 하자마자, 그것은 그를 노예 신분으로 전체주의 국가에 팔았다. 세속주의는 오직 그를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노예의 전제군주에게 팔기 위하여 교회의 노예 신분으로부터 사람을 해방시킨다.

 

유물론은 하느님을 부인한다, 세속주의는 단순히 그를 무시한다. 적어도 그것이 초기의 태도였다. 더욱 최근에는, 세속주의는 그것이 한 때 종교의 전체주의적 속박에 저항하였던 그 종교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듯이 더욱 투쟁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20세기의 세속주의는 사람은 하느님이 필요 없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조심해라! 인간 사회의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는 이 철학은 오직 불안, 증오, 불행, 전쟁, 그리고 전 세계적 재난으로 인도할 것이다.

 

세속주의는 인류에게 결코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 인간 사회에서 하느님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잘 주목해라! 교회의 전체주의에 대한 세속의 반기의 인정 깊은 수익들을 조급하게 포기하지 마라. 서구 문명은 세속의 반기의 결과로, 오늘날 많은 자유와 만족을 누리고 있다. 세속주의의 엄청난 잘못은 이것이었다. 종교의 권위에 의해서 생활의 거의 전부가 지배되는 것에 대항하여 반기를 들면서, 그리고 그러한 교회의 횡포로부터 자유를 획득한 후에, 세속주의자들은 하느님 자신에 대항하는 반란을 때로는 잠잠하게 그리고 때로는 공개적으로 일으켰다.

 

너희는 미국 산업주의의 놀라운 창조성과 그리고 서구 문명의 전례 없는 물질적 진보로 세속주의의 반란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리고 세속주의의 반란이 너무 멀리 갔고 그리고 하느님과 참된 종교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세계 전쟁과 국제적인 불안정이라는 예기치 못한 결과가 역시 뒤 따라 발생되었다.

 

현대 세속주의의 반란의 축복들: 관용, 사회봉사, 민주적 정부, 그리고 시민의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희생시킬 필요는 없다. 과학을 증진시키고 교육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세속주의자들이 참 종교에 반목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세속주의가 생활의 확장에서의 모든 이러한 최근 이득들에 유일한 본원은 아니다. 20세기의 소득 이면에는 과학과 세속주의 만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들의 인지되지 않고 인정받지 못한 영적 작업들이 있다.

 

하느님 없이, 종교가 없이, 과학적인 세속주의는 결코 그 기세들을 합동할 수 없고, 그것의 다양하고 경쟁적인 이권들, 종족들, 그리고 민족주의들을 조화시킬 수 없다. 이러한 세속주의의 인간사회는, 비교할 수 없는 유물론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붕괴되고 있다. 이 반목의 붕괴를 막는 가장 응집력 있는 기세는 민족주의이다. 그리고 민족주의는 세계 평화의 으뜸 되는 장애물이다.

 

세속주의의 선천적인 결점은 정치와 힘을 위하여 윤리와 종교를 무시하는 것이다. 너희는 하느님의 아버지신분을 무시하거나 거부한다면, 사람들의 형제신분을 절대로 이룩할 수 없다.

 

세속의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낙관주의는 환상이다. 하느님 없이, 자유나 해방도, 재산이나 풍요도 평화로 인도할 수 없다.

 

과학, 교육, 산업, 그리고 사회의 완벽한 세속화(世俗化)는 오직 재난으로 인도할 수 있다. 20세기의 초반 1/3 기간 동안, 유란시아인들은 그 때까지 전체 기독교 천계법시대(전체 기독교 시대) 동안에 죽은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리고 이것은 유물론과 세속주의의 무시무시한 추수의 시작에 불과할 뿐이며 더욱 끔찍한 파괴가 아직 남아있다.


9. 기독교의 문제점

 

너희들의 영적인 유산, 유물론적 그리고 세속 시대의 불모의 시간들에까지 세기를 통하여 흘러내리는 진리의 강의 가치를 간과하지 말라. 지나간 시대들의 미신적인 신조들로부터 벗어나려는 너희들의 모든 가치 있는 노력들 속에서, 너희가 영원한 진리를 견고히 붙잡고 있는 것을 확실히 해라. 그러나 인내하라! 현재 미신의 반란이 지나가면, 예수의 복음의 진리들이 새롭고 더 좋은 길을 비추기 위하여 영광스럽게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이교화 되고 사회화된 기독교는 손상되지 않은 예수의 가르침들과 새롭게 접촉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세상에서의 예수의 삶에 대한 새로운 비전의 부족을 서글퍼 한다. 예수의 종교에 대한 새롭고도 보다 완전한 계시가 유물론적 세속주의의 제국을 정복하고 그리고 유물론적 자연주의의 세계 지배를 타도하도록 운명지어 졌다. 유란시아는 이제 사회적 재조정, 도덕적 소생(蘇生), 그리고 영적인 계몽의 가장 놀랍고 그리고 매혹적인 신(新)시대들 중의 하나의 바로 그 순간 위에서 지금 떨고 있다.

 

예수의 가르침들은, 비록 크게 변경되기는 하였지만, 그것들의 탄생기의 신비적 이교들, 암흑기의 무지와 미신에서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제는 20세기의 유물론, 기계론, 그리고 세속주의에 대하여 서서히 승리하고 있다. 그리고 큰 시험과 위협 받은 패배의 그러한 시기는 항상 위대한 계시의 시대이다.

 

종교는 새로운 지도자들, 예수와 그의 비길 데 없는 가르침들에만 오로지 용감하게 의존하려는 영적 남자들과 여자들을 필요로 한다. 만약에 기독교가 사회적이고 물질적인 문제들에 계속 바쁘게 일하면서 그것의 영적 임무에 계속 게으르다면, 영적 부흥은 사람들의 영적인 혁신에만 오로지 헌신하려는 예수의 종교의 이 새로운 선생들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그러고 나서, 영으로 태어난 이 사람들은 세상의 사회적, 도덕적, 경제적, 정치적 재편성에 요구되는 지도력과 영감을 재빨리 공급할 것이다.

 

현대 시대는 사실들과 모순 되고 그리고 진리, 아름다움. 그리고 선(眞, 美, 善)의 최고의 개념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종교는 받아들이기를 거부할 것이다. 현대의 왜곡되고 손상된 기독교에 대한 참되고 근본적인 기초들 -예수의 참된 일생과 가르침들- 을 재발견하기 위한 시간이 종을 치고 있다.

 

원시인은 종교적인 두려움에 미신적 속박의 삶을 살았다. 현대의 문명인들은 강력한 종교적 신념의 지배 하에 떨어진다는 생각을 두려워한다. 생각하는 사람은 종교에 의해서 사로잡히게 되는 것을 항상 염려하였다. 강력하고 선동하는 종교가 사람을 지배하려고 위협 할 때, 그는 반드시 그것을 합리화, 전통화, 그리고 제도화하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을 통제하기를 희망한다. 그러한 과정에 의해서, 계시된 종교조차도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지배하게 된다. 현대의 남녀 지성인들은 예수의 종교가 자신들에게 -그리고 자신들과 함께-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것을 회피한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두려움들은 근거가 충분히 있다. 예수의 종교는 사람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알기 위하여 자신들의 삶을 바치도록 요구하며 생활의 에너지를 사람의 형제신분의 비 이기적 봉사에 바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정말로 그 신자들을 지배하고 변환시킨다.

 

이기적인 남자와 여자들은 필사자 사람에게 제공되었던 것 중 가장 위대한 영적 보물에 대하여서도 단순히 그러한 값을 지불하지 않으려고 한다. 오직 사람이 어리석고 현혹시키는 이기심의 추구에 수반되는 비참한 실망감으로 충분히 환멸을 느끼게 되었을 때, 그리고 정형화된 종교의 불모지를 발견한 후에, 사람은 천국 복음 -나사렛 예수의 종교- 으로 전심으로 돌아서고자 하는 마음이 나게 될 것이다.

 

세계는 더욱 직접 체험에 의한 종교가 필요하다. 기독교 -20세기의 종교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조차도 예수에 관한 종교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그렇게 주로 간접적임을 경험하는 종교다. 그들은 그들의 용인된 종교적 교사들이 전해주는 대로 그들의 종교를 받아들인다. 만일 실제로 이 세상에 사셨던 대로의 예수를 볼 수 있고, 생명을 주는 그의 가르침들을 직접적으로 알게만 된다면, 세계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깨우침을 주었을까! 아름다운 사물들을 묘사하는 말들은 그것을 보는 것처럼 감동을 줄 수 없다, 또한 신경조(信經調)로 표현된 말들은 하느님의 현존을 아는 경험처럼 사람의 혼에게 영감을 줄 수 없다. 그러나 기대하는 신앙은 세상들 저 너머에 신성한 가치들의 영원한 영적 실체들의 입장을 위하여 사람 혼의 소망의 문을 언제나 활짝 열고 있을 것이다.

 

기독교는 인간의 탐욕, 전쟁의 광기, 그리고 힘에 대한 강한 욕망의 도전 앞에서 그것의 이상들을 과감히 낮추어 놓았다. 그러나 예수의 종교는, 사람에게 들어있는 최상의 것을 향하여 동물적 진화의 이 모든 유산들의 단계를 넘어서라고 그리고 그 힘으로 참된 인간 운명의 도덕적 정상을 달성하라고 외치는, 결백하고 초월적인 영적 호소로서 서 있다.

 

기독교는 형식주의, 과대한 조직화, 지성주의, 그리고 다른 비(非)영적인 경향들에 의해 서서히 죽어 가는 위협을 받고 있다. 현대 기독교 교회는 이어지는 인류 세대들에게 영적 변환을 계속적으로 효과를 미치도록 예수께서 위임하셨던 것처럼 그러한 활동적인 신자들의 형제신분이 아니다.

 

소위 기독교라는 공동체는 종교적인 믿음과 실천은 물론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운동이 되었다. 현대 기독교의 물결은 많은 고대의 이교적 늪지대와 미개한 저습지(低濕地)로 배수된다. 많은 낡은 문화적 분수들이 그것의 독점적인 근원으로 여겨지는 갈릴리의 고지대(高地帶)는 물론 이 현대의 문화적 물결 속으로 배수된다.

 

10. 미래

 

기독교는 이 세상에 정말로 위대한 봉사를 해 온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 가장 절실한 것은 예수이다. 세계는 주(主)를 모든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영으로 태어난 필사자들의 경험 속에서 세상에 다시 사시는 예수를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원시 기독교의 소생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너희는 너희가 있는 그 자리에서 앞으로 나가야만 한다. 현대의 문화는 예수의 삶에 대한 새로운 계시로 영적 세례를 받아야만 되고, 영원한 구원에 대한 그의 복음의 새로운 납득의 빛이 비쳐져야 한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렇게 들어올려졌을 때, 그가 모든 사람들을 그에게로 이끄실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정복자들 이상이 되어야 하며, 더욱 모든 사람들에게 증진된 생활과 영감의 흘러넘치는 근원들이 되어야 한다. 종교는 개인적인 경험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실체를 발견함으로 인하여 신성하게 되기 전에는 하나의 고양된 인본주의에 불과할 뿐이다.

 

세상에서 예수 삶의 아름다움과 장엄함, 인간성과 신성, 소박함과 독특성은 사람을 구원하고 하느님을 계시하는 그렇게 인상적이고 매력적인 장면을 나타내었다. 그리하여 모든 시대의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은 하느님의 사람 형체로서의 그러한 초월적인 증여로부터 감히 신경(信經)을 만들어 내거나 영적 속박의 신학 체제들을 창조하는 것으로부터 효과적으로 제지되어야만 한다. 예수 안에서 우주는 사랑의 영이 시간의 물질적인 불리한 조건들을 이겼고 그리고 물리적인 기원의 사실을 극복했던 필사자 사람을 생산했다.

 

항상 마음에 간직하라. 하느님과 사람들은 서로를 필요하다. 그들은 우주 최종의 신성한 운명으로 영원한 품성 경험의 충분하고 최종적인 달성까지 서로가 필요하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는 말은 예수께서 하신 것 중에서, 그의 아버지는 살아 계시며 사랑하시는 영이시라는 선언 다음으로, 아마도 가장 위대한 선언이었다.

 

주(主)를 위해 사람들을 설득할 때, 사람과 그의 세계를 변환시키는 것은 강제성, 의무, 또는 협정의 첫 단계가 아니라, 오히려 앞으로 나아가 그의 형제를 사랑으로 끌어안고 그리고 영적 인도아래 그를 필사 실재의 보다 높고 신성한 목표로 휘몰아치는 예수공동체의 전조가 되는 자유 봉사와 해방을 사랑하는 헌신의 두 번째 단계이다. 기독교는 비록 지금 첫 단계로 기꺼이 가고 있지만, 진정으로 두 번째 단계를 행하는 자들이 너무 적기 때문에  진실로 그가 그의 제자들에게 삶을 살고 사랑하고 그리고 봉사하라고 가르친 대로 삶을 살고 사랑하는 예수의 공언된 추종자들이 너무 적다. 인류가 도덕적 암흑에서 풀이 죽고 비틀거린다.

 

천국의 예수와 형제신분의 영적 갱생으로 새롭고도 변환된 인간 사회를 건설하는 모험으로의 부름이, 그들이 육신으로서의 예수님 동행자들로 세상에서 거닐었던 날들 이후에는 감동을 받아보지 못하였음으로, 그를 믿는 모든 이들을 전율케 할 것이다.

 

하느님의 실체를 부인하는 사회적 체계나 정치적 제도는 인간 문명의 증진에 어떤 건설적이고 지속적인 방법으로도 기여할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는, 오늘날 세분되고 세속화됨으로써, 그것의 앞으로의 발전에 가장 큰 장애를 주고 있으며 특별히 이것은 동양에서 사실이다. 


교회중심주의는 당장 그리고 영원히 살아있는 신앙, 성장하는 영, 그리고 천국의 영적 연합으로 사람의 형제신분에 있는 예수의 신앙 동료들의 직접적인 경험과 양립될 수 없다. 과거 성취의 전통들을 지키려는 칭찬할만한 욕망은 종종 경배의 과도한 체계들의 방어로 귀결된다. 옛날 생각 체계들을 촉진하고자 하는 선의의 욕망은, 현대인들의 확장하고 전진하는 영적 갈망들을 만족시키도록 고안된 새롭고도 적당한 수단들과 방법들의 후원을 효과적으로 제지한다. 마찬가지로, 20세기의 기독교 교회들은 위대하게 서 있다, 그러나, 의식하지 못하지만, 전적으로 참된 복음 -나사렛 예수의 가르침들- 의 즉각적인 진보에 장애물들이다.

 

복음의 그리스도에게 기쁨으로 충성을 바치려는 많은 진지한 사람들은, 그의 일생과 가르침들을 거의 보여주지 못하고, 그리고 그가 기초하셨던 것에 대해 잘못 가르침을 받아온 교회를 열심히 후원하는 것이 매우 힘들다는 것을 발견한다. 예수께서는 소위 기독교 교회라는 것을 세우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는 그의 본성과 일치되는 모든 방법으로 세상에서 그의 필생의 작업에 대하여 실재하는 최고의 해석자로 그것을 육성하였다.

 

만약에 기독교 교회가 주(主)의 계획을 용감하게 지지하기만 한다면, 분명히 무관심한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러한 영적 약속에 참여하기 위하여 몰려들 것이며, 이 커다란 모험과 끝까지 가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는 "스스로에 대항하여 나뉜 집은 지탱될 수 없다"는 자체 표어들 중의 하나에 구체화된 운명과 직면하고 있다. 비기독교 세계는 파벌화 된 기독교계에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살아있는 예수만이 기독교의 가능한 통일의 유일한 희망이다. 참된 교회 -예수와의 형제신분- 는 보이지 않고, 영적이며, 획일성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합일로 특징지어진다. 획일성은 유물론적 본성을 갖는 물리적 세계의 꼬리표이다. 영적 합일은 살아있는 예수와 신앙의 결합의 열매이다. 눈에 보이는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그리고 영적 형제신분의 진보를 더 이상 방해하는 것을 거절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형제신분은 제도화된 사회 조직과는 대조가 되는 살아있는 유기체가 되도록 운명지어졌다. 그것은 그러한 사회적 조직들을 잘 활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로 대치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그러나 비록 20세기의 기독교도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종족들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의 연합된 도덕적 진수(眞髓)의 산물이다, 그리고 그것은 진실로 세상의 선(善)을 위한 가장 큰 힘들 중의 하나이었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것의 선천적 또는 후천적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그것을 가볍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는 강력한 도덕적 감정들로 사려 깊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여전히 꾸려나가고 있다.

 

그러나 교회가 상업과 정치에 가담한 것은 핑계를 댈 수 없다 그러한 부정(不淨)한 동맹들은 주(主)에 대한 악랄한 배반이다. 그리고 진리를 순수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제도화된 강력한 교회가 새로 발생되는 신앙을 종종 감히 질식시키려고 하였으며, 비정통적인 옷을 입고 우연히 나타났던 진리의 전달자들을 박해하려고 하였던 것을 좀처럼 잊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 그러한 형태의 경배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았었다면 그러한 교회가 살아남지 못했으리라는 사실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영적으로 나태한 많은 사람들은 의식적이고 신성한 전통의 오래되고 권위적인 종교를 갈망한다. 인간 진화와 영적 진보가 모든 사람들에게 종교의 권위를 불필요하게 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 그리고 천국의 불가시적(不可視的) 형제신분이 만약에 그들이 단지 진실로 영으로 인도된 하느님의 아들들이 기꺼이 되려고만 한다면, 다양한 사회적 그리고 변덕스러운 계급들의 가족 집단들을 잘 수용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와의 이 형제신분에는 분파적인 적대 관계나 집단적인 증오심 또는 도덕적인 우월성과 영적 무오성(無誤性)에 대한 주장들이 있을 자리가 없다.

 

기독교인들의 이러한 다양한 집단화(集團化)들은 서구 문명의 다양한 민족들 중에서 신자가 되고자 하는 다양한 다른 유형들을 수용하는 일에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기독교계의 분열은, 예수의 복음을 동양 민족들에게 전해주려고 시도할 때 심각한 약점을 나타낸다. 이 민족들은 점점 더 예수에 관한 종교가 되는 기독교와는 많이 다르고 별개의 예수의 종교가 있다는 것을 아직 납득하지 못한다.

 

유란시아의 가장 큰 소망은 그의 오늘날 공언된 추종자들의 여러 가족들을 사랑의 봉사로서 영적으로 결합시킬 새롭고 확대된 그의 구원의 메시지의 발표로 예수의 새로운 계시의 가능성 속에 있다.

 

세속적인 교육일지라도, 만약에 그것이 인생 설계와 성격 진보에 어떻게 관여할 수 있는지를 젊은이에게 가르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면, 이 위대한 영적 부흥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모든 교육의 목적은 삶의 최극 목표, 잘 균형이 잡히고 장엄한 품성의 계발을 촉진시키고 진행시키는 것이어야만 한다. 과도한 자기만족 대신에 도덕적 훈련에 대한 가르침의 커다란 필요가 있다. 그러한 기초 위에서 종교는 필사자의 생활을 확대시키고 풍성하게 하는, 그리고 심지어는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고 강화시키는 영적 자극을 제공할 수 있다.

 

기독교는 즉석에서 만들어진 종교이다. 그러므로 저단 기어로 작동되어야만 한다. 고단 기어의 영적 작업들은 새로운 계시 그리고 예수의 참된 종교에 대한 보다 일반적인 수용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십자가형을 당한 목수의 보통 제자들이 300년 동안 로마세계를 정복하고 그 후에는 로마를 타도한 야만인들에게 계속 승리한 이러한 가르침들을 시작하였다는 것을 볼 때, 위대한 종교이다. 바로 이 기독교가 히브리 신학과 그리스 철학의 전체적인 조류를 정복 -흡수하였고 강화하였음- 하였다. 그러고 나서, 이 기독교 종교가 신비와 이교 정신의 과도한 투약의 결과로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혼수상태에 놓이게 되었을 때, 그것은 스스로 다시 일어났으며 실질적으로 전체 서구 세계를 다시 정복하였다. 기독교는 그것에게 영원을 부여하기에 충분할 만큼 예수의 가르침들을 간직하고 있다.

 

만약에 기독교가 예수의 가르침들을 더 많이 파악할 수만 있다면, 그의 새롭고도 증가되는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도록 현대인을 돕는 일을 더욱 많이 할 수 있었다.

 

기독교는 전 세계의 마음속에 사회적인 체계, 산업적 생활. 그리고 서구 문명의 도덕적인 표준들로 알려졌기 때문에 큰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하여 기독교는, 이상주의가 결여된 과학, 원칙이 없는 정치, 일하지 않고도 얻는 재물, 억제되지 않는 쾌락, 성격이 결여된 지식, 양심적이지 못한 힘, 그리고 도덕성이 결여된 산업을 허용하는 죄로 비틀거리는 사회를 무의식적으로 후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현대 기독교의 희망은 그것이 그렇게 씩씩하게 찬양하는 십자가 앞에 겸손하게 허리를 굽히고, 거기에서 나사렛의 예수에게 필사자 사람이 들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진리들 -하느님의 아버지신분과 사람의 형제신분에 대한 살아있는 복음- 을 배우면서 서구 문명의 사회적 체계들과 산업 정책들을 후원하는 것을 중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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