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體)가 있고 용(用)이 있다. 체만 이루어지면 상제님께서는 목석이라도 기운을 붙여 쓰면 된다고 하셨다. 사람이 많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포덕을 많이 해라. 포덕을 해서 잘 지도해서 우리의 목적을 잘 알려주어 목적을 이루도록 도인으로 만들어 나가고, 그러기 위해 나 스스로도 도인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임원이 실제로 믿지 않으면서 붕 떠 있다. 뭐라고 할까, 항상 허영에 차 있는 것 같다. 우리가 도통을 받는다는데, 큰 운수를 받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실제로 받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말로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다 알지만 실천이 안 된다.
우리에게는 신조가 있다. 신조는 어떤 조항을 믿는다는 것이다. 임원이라도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알아도 실천이 안 되고 말로만 한다. 실천이 잘 안 되고 있다. 신조가 무엇이냐고 하면 사강령과 삼요체이다. 사강령은 안심⋅안신⋅경천⋅수도이다. 안심⋅안신은 마음을 편안케 하고 몸을 편안케 함이고, 경천⋅수도는 하느님을 믿는 것, 즉 공경하는 것, 그리고 거기에 따라 수도해 나가는 것이다. 신조를 모르는 임원도 있을 것이다. 알면서도 확실히 모르고 입으로만 말하고 실천을 못하는 임원도 있다. 우리가 제일 먼저 지키고 믿어야 할 것이 신조다.
첫째로 안심, 마음이 안정되어야 한다. 마음이 안정이 안 되면 절대로 수도가 될 수 없다. 그다음은 안신, 몸이 안정되어야 한다. 몸이 안정되지 못하면 수도가 될 수 없다. 모르니까 임원 앞에서 무릎 꿇는 게 아주 습관이 되어서 잘 안 고쳐지고 있다. 임원이라고 그 앞에서 무릎 꿇고 있다가 앉기도 힘들고 일어날 때 바로 못 일어나고 일어나도 걷지 못한다. 그것은 수도하는 데 있어서 안심⋅안신에 어긋난다. 무릎을 꿇고 앉으면 다리가 아파서 몸과 마음이 편하지 않다.
늘 말하지만 누구를 도인으로 만들려고 얘기할 때, 듣는 사람은 배우려 해야 하고, 교화하는 사람은 듣는 사람이 잘 알아듣도록 해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우선 교화할 때의 위치와 환경을 잘 조성해 주어야 한다. 앉아서 듣는 사람은 몸이 편안하여야 상대방 이야기가 옳게 귀에 들어온다. 내 몸이 불편하면 다 귀찮은 것이다. 아무리 도가 좋다고 해도 내가 싫증이 나고 귀찮으면 잔소리로 들리고 시간만 끝나기를 기다린다. 아무리 좋은 얘기도 내가 듣기 싫으면 잔소리로 들린다. 무릎 꿇려서 뭐가 되겠어요? 이게 영 잘 안 고쳐진다.
순감들 공부시키면서 보면 앉을 때 무릎 꿇고 앉는다. 상급 임원이 대부분이고 중간 임원이 순감된 사람도 있으니 전체가 다 그렇다는 것이다. 윗임원에게 그렇게 배웠다는 것이다. 내가 “외수들은 무릎 꿇는 것이 힘든데 내수들은 편하냐?” 하고 물어보니 “네” 그런다. 사람이라면 다 똑같이 힘들다. 외수나 내수나 마찬가지다. 그것부터 없애야 한다.
꿇어앉는다고 해서 예(禮)가 아니다. 예라고 하는 것은 알맞아야 하는 것이지, 거북스러울 때면 이미 예가 아니다. 습관이 되었다. 순감들도 잘 고쳐지지 않는다. 한 사람이 그러면 다 그런다. ‘내 앞에서는 내가 질색하니까 그러지 않지만, 완전히 습관이 돼서 그러는구나.’ 한다. 앉을 때는 한쪽 무릎을 세우고 한쪽 다리는 땅에 놓으면 편안하다. 그것을 앉을 때의 법좌(法座)로 생각하라.
기도할 때는 법좌하는데, 밖에서는 책상다리라 한다. 앉아서 공부할 때는 책상다리를 하지만 어른 앞에서 책상다리를 하고 있으면 밖의 사람들은 대번에 당돌하다고 한다. 그러나 상제님 앞에서도 우리는 법좌를 하고 앉는다. 기도할 때 주문할 때 법좌가 제일 편하다. 그래서 법좌라 한다. 앉아서 공부하는 데는 제일 편안한 것이 책상다리, 법좌다. 이 자세는 오래 앉아있어도 편안하다.
다리 하나 세우고 앉는 것을 법좌로 생각해라. 전에 도주님을 모실 때, 아침에 부르시든지 해서 죽 들어가 어떻게 앉느냐면 지금 내가 얘기한 대로 다리 하나 세우고 앉았다. 무릎 꿇고 안 앉았다. 인사드릴 때도 꼭 절 안 했다. 며칠 못 뵈었을 때 뵈면 절을 하지만 날마다 뵐 때는 읍배 식으로 허리만 숙였다. 들어가서 죽 앉을 때는 별말씀을 안 하셔도 내가 얘기한 대로 앉았다. 그게 법좌다. 그게 법좌라고 생각하면 된다. 도주님 모시고 있으면서도 그랬다. 무릎 꿇고 앉으면 앉는 사람도 힘들고 보는 사람도 거북스럽다. 서로가 편안해야 한다. 앞으로 들어가 인사드리고 앉으면 법좌, 한 다리 세우고 앉는다. 공부할 때 법좌로 한다. 밖에서 볼 때 당돌하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가 수도하는 데 제일 중요한 것이 안심⋅안신이다. 안심, 마음을 편안히 하여 안정이 되야 되고 안신, 몸을 편안히 해야 한다. 그래서 경천, 하느님을 공경하고 수도하는 것이다. 이것 안심⋅안신⋅경천⋅수도가 우리의 4대 강령이다. 강령은 으뜸 되는 줄거리로 간단하면서도 핵심이다. 줄거리만 간단하게 얘기한 것이다.
마음이 편안하다는 것은 마음이 안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안심이 되어야 안신이 된다. 마음이 안정이 안 되면 몸이 편하지 않다. 수도해 나가는 데 제일 중요한 것이 이것이다. 사람의 모든 행동에 있어서 그것을 주관하는 것은 마음이다. 그러니 우리는 무편무사, 편벽됨이 없고 삿됨이 없어야 한다. 편벽됨이 없다고 말로만 해서는 안 된다. 무편무사, 공명정대를 생활화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안심이 될 수 없다. 거짓말하고 나쁜 일 다 하고 누구를 때리고 그러면 안심이 안 된다. 때리는 사람은 오그리고 자고, 맞는 사람은 다리 펴고 잔다는 말도 있다. 그릇된 행동을 하면 마음이 안정이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첫째로 무편무사하고 공명정대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본심이다. 말로만 하고 그것을 모르고 못 지키면 안 된다. 본래 본연의 양심으로 돌아가 온 정신, 온 마음이 해원상생의 대도(大道)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닦는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닦아야 한다. 그래서 남이 이러고저러고 하는 데 빠지지 말고, 나에게 당치 않는 허영과 영화에 망동해서는 안 된다. 이것을 안심이라 한다.
쉽게 말해서 안심은 마음이 원 본래의 양심, 본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무편무사, 편벽됨, 삿됨 없는 공명정대한 마음으로 닦는 것이다. 자꾸 닦아서 해원상생의 도에 하나로 묶여 들어가야 한다. 안심이 없이는 안신이 있을 수 없다. 안심, 마음이 안정되어야 안신, 몸이 안정되는 것이다. 조금도 남이 꾀는 말 어디에 빠지지도 말고, 당치 않는 허영의 욕심도 부리지 말고, 내 할 일을 다 하면 마음이 안정되니, 이것이 안심이다. 무편무사⋅공명정대하지 못했을 때 안심이 안 된다. 그러면 안신이 안 된다. 누구를 때렸으면 마음이 편할 리 없고, 마음이 안 편하면 몸도 편할 리 없다. 그래서 안심⋅안신이다. 마음이 안정되어야 하고 몸이 안정되어야 한다.
사람 마음의 표현은 몸이다. 행동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표현이다. 마음을 표현하는 자체는 몸뚱이다. 내 몸의 처신⋅행동에 있어서 법리에 합당하고 도리에 적중해야 한다. 비리(非理), 비례(非禮)의 허영에 망동치 않아야 한다. 이것이 안신이다. 몸으로 행동하는 것은 마음의 표현이니 예에 합당하고 의리에 적중해야 한다. 의리가 아니고 예가 아닌 것에 빠지지 말라. 몸과 마음이 안정되어야 수도가 된다.
경천이라는 것은 모든 행동에 있어서 조심하고 상제님 받드는 마음을 자나 깨나 잊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항상 나를 내려다보고 계신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을 늘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하느님을 공경하고 믿는다 해도 늘 부족한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것이 경천이다. 우리가 모르니까 그렇지 상제님께서는 다 보고 계신다. 그것을 모르니까, 믿지 않으니까 안 좋은 일을 한다. 그걸 모르니까 속이기도 하고 거짓말도 하고 그런다. 하느님께서 내려다보신다는 것을 자나 깨나 늘 마음속에 잊지 말고 늘 부족한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것이 경이고 거기서 경천이 나온다.
수도에 있어서는 심신을 늘 침착하고 항상 잠심(潛心)해야 한다. 내 마음과 몸을 늘 침잠하게 하고 정신을 아주 고요하게 해야 한다. 그래서 항상 상제님을 모시는 정신을 모아서 영통의 통일을 목적으로 삼고 경지우경(敬之又敬), 공경하고 공경하여 성지우성(誠之又誠), 정성하고 정성해야 한다. 그렇게 어렵게 해야 한다. 잠시도 잊지 말고 이것을 가슴속에 새겨두고 있어야 수도가 된다.
정신적으로 마음이 안정되고 몸이 안정되어 편안하게 해야 한다. 안심⋅안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경천⋅수도, 하느님을 자나 깨나 공경하며 직접 곁에서 보고 계신다는 것을 믿어 늘 부족함을 두려워하고 심신을 침착하고 고요하게 하여 늘 상제님 받드는 마음을 모아서 영통을 목적으로 경지우경, 성지우성해야 한다. 이것을 항상 내 마음과 몸에 새겨야 한다. 이것이 수도다. 이것이 실천되어야 한다. 말로만 해서는 안 된다. 어려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다른 사람들은 못 지켜도 우리는 이것을 지키고 실천할 수 있다. 우리 도가 참으로 좋다는 것을 믿고, 앞으로 도를 통한다는 것을 확신하니까 쉬운 것이다.
지금 순감들 120명이 공부하고 있는데, 1층은 좁아서 봉강전 2, 3층, 정각원 세 군데에 나누어서 있다. 내일모레면 석 달째이다. 보기에는 주문 읽고 하는 것이 쉬워 보여도 그게 아니다. 참으로 어렵다. 석 달을 잠 안 자고 공부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말이 석 달이지 졸리면 귀찮다. 그런데 그들은 과히 그렇게 어렵게들 생각지 않는다. 저렇게 어렵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자기네들이 실제로 시료를 해나가고 있으니까 어려운 줄을 모른다. 죽는 사람을 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그렇다. 되고 안 되고 그런 게 없다.
지금 240명을 시료 보는데, 몇천 명을 본다고 해도 시간이 많이 안 걸린다. 요즘은 15분씩 하루에 두 번 본다. 8시에서 8시 15분, 9시에서 9시 15분, 이 시간에 240명을 다 본다. 그저께 두 명이 덜 나았다 했는데, 덜 낫는다는 사람이 두세 명 있어도 결국은 다 낫는다. 다 나아서 나간다. 시료 보는 시간이 줄었어도 낫는 비율은 더 높다. 전부 다 된다. 전에는 5∼6명, 많으면 15명까지 덜 나았다는 사람이 나왔다. 순감들이 시료를 하면서 다 낫는 것을 확인하니까 어려워도 어려운 줄 모르고 해나간다. 석 달씩이나 잠을 안 잔다는 것은 말이 그렇지 어렵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지금 사수까지 해서 한 20명만 하면 다 마쳐진다. 그러면 시료 시간이 5분으로 당겨질 것이다. 안 되는 게 없다. 지금은 다 된다. 그걸 믿으니까, 실제로 해나가니까 어려운 줄 모르고 해나가고 있다.
우리의 신조, 이것을 우리가 잘 알고 실천해 나가야 한다. 순감들 잠을 석 달 안 자도 몸에 아무 이상이 없다. 속이 안 좋은 것도 없고 먹는 것도 잘 먹는다. 내가 포천에도 마음 놓고 간다. 고비는 다 지났다. 자기들끼리 내버려둬도 뭐한 게 아무것도 없다. 지금 일부 몇 사람을 또 시키고 있다. 우리가 현재 해나가고 있는 것을 사회에서는 이해 못 한다.
시료는 순감들이 순전히 직접 정신력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네들이 확신한다. 밖에서 신들려서 신통력을 발휘해서 누구를 뭐 낫게 해 주고 그런 게 아니다. 이것은 실제 자기가 직접 보는 것이다. 이것을 신안(神眼)이라 한다. 신안으로 직접 보면 그냥 원래대로 돌아간다. 신안에 딱 마주치면 다 나아지고 원 상태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어디 힘을 빌려서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15분인데 이번 공부하고 나면 5분으로 당겨진다. 그러면 마음대로 된다. 전경에 나오는 것처럼 “건너다보기만 해도 낫고…”(교운 1장 58절) 하는 것이 어려울 게 없다. 서울과 부산에 떨어져 있는 두 사람도 한꺼번에 볼 수 있다. 세 사람, 다섯 사람도 가능하다. 순감들에게 하루 두 시간씩 바람 쐬고 운동시키고 있다. 그래도 얼굴이 타지 않는다. 얼굴들이 다 좋아졌잖아?
임원들 집 짓고 일하고 단청했는데 그것이 공부하는 이치와 똑같다. 집을 짓든 단청을 하든, 생짜배기를 데려다 붙여 놓아도 다 따라가졌다. 지금 안 해본 사람도 갖다 붙여 놓으면 다 따라 한다. 외수들 집 지을 때도 갖다 놓으면 다 한다. 밖의 사람에게 하라 하면 잘한다 해도 우리만큼 못 한다. 밖에서 평생 배운 목수 갖다 놓아도 그렇게는 못 한다. 몸부터 사려서 다치기만 더 다친다. 우리는 믿으니까 밖의 사람하고 다르다. 우리는 믿으니 몸을 안 사린다. 그래서 밖의 사람보다 몇 배를 한다. 밖에서 일류 목수나 미장이라 하더라도 우리를 못 따라간다. 우리는 못 하는 사람 붙여 놓아도 다 한다. 밖의 사람들보다 낫다. 뭐든지 그렇다. 그게 신심(信心)이다. 다른 게 아니다. 신심이니까 내가 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우리 일할 때 목수고 미장이고 아는 사람을 안 쓸려고 했다. 배웠다고 엉뚱하게 시키는 대로 안 하고 다른 짓 한다. 아니까 자꾸 다른 것이 들어간다. 모르는 사람은 시키는 대로 한다. 우리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여러분 하는 것도 똑같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공부를 하면 밖의 도인들에게도 기운이 다 간다. 공부하는 거나 똑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된다.
그 전에는 시료를 볼 때 꼭 어디에 있고 누구란 걸 알아야 하질 않았어? 지금은 누구라고 하면 대번에 찾아진다. 그 사람을 알든 모르든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간에 다 찾아진다. 지난번 대전방면에서 차 사고 났을 때 이 선감은 확인하러 가서 12시까지 연락이 없고, 상계⋅전농선감이 12시쯤 각 병원에 문의해도 대전 어느 병원에 있는지 몰랐다. 그래도 차를 알았기에 “대전방면인데 환자 몇 명” 해서 다 찾아서 낫게 했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신명이 하는 것이다. 처음 포천 시료 때는 베니아판으로 칸막이를 해놓고, 몇 호 몇 호 번호까지 정확히 써서 놓았다. 칸막이 위에 아픈 사람 이름, 병명 등을 써서 올려놓았고 순감들 조에 몇 호에 있다 써주면 찾아서 고쳤다. 그때는 그것도 쉽지 않았다. 지금은 그렇게 안 한다. 병명 이름만 보고 다 찾아낸다. 포천에도 칸막이를 없앴다. 방면에서 급한 것은 바로 된다.
퇴배? 그럼 나가는 거잖아? 내일 새벽 4시 30분에 나가면 좋은데…, 지금 퇴배해? 그럼 퇴배 드리고 아침에 가라. 가까운 데는 저녁 먹고 가도 괜찮고, 먼 데는 자고 내일 가라. 기사 생각을 해야 한다. 저녁에 늦어서 그렇게 가면 안 된다. 밤을 새워서 가려면 아침에 퇴배를 드려라.
중곡동 봉안 치성은 다 못 가고 수임 임원 몇 명만 간다. 다 못 갈 바에야 그렇게 한다. 성은 5월 21일이다.
아침에 가라! 서울 가까운 데는 오늘 가라. 먼 데는 차 운전시켜 밤새 내려가지 말고, 자고 아침에 가야 한다. 내 조심은 내가 해야 한다. 믿는 것은 믿고 주의해야 할 것은 주의해야 한다. 나도 그렇다. 사고가 없을 거라고 믿어도 걱정이 된다.
전에 종각에 앉아있었는데, 참배객이 상태가 안 좋은 것이 눈에 띄어서 그 즉시 봐 준 적이 있다. 성주방면인가? 아마 좋아졌을 것이다. 급체했다고 그러더라.
절대 미성년자들, 처녀들 입도시키지 마라. 성금 관계는 도장에 300만 원, 방면에 200만 원 한도 내에서 법대로 잘 시행해 나가라. 300만 원, 200만 원 했다고 가족 망했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 것이다. 지난번 천안방면에서 두 내외가 1,500만 원인가, 1,600만 원을 냈는데, 돈이 도장에 들어오기는 다 들어왔다. 3년을 두고 11번에 걸쳐 냈다. 이제는 그만뒀는데 현재 사정이 있어서 돈을 받으려 고소장을 낸다 했다. 두 내외가 다 믿다가 그렇게 되었다. 성금이 들어온 것을 내주는 법도 없는 것이다. 들어오면 상관없다. 세 들어 살았는데, 남자는 회사 다니고 여자가 몰래 뺐다고 한다. 그 집이 부자였다면 남편 몰래 할 수 있지만, 셋방살이하는 사람이 몰래 뺐다면 모를 수가 없다. 회사 다니는 남자는 배웠다 하는 사람인데, 못 배운 내수 선무에게 속았다고 할 수가 없다. 말썽날 것 없다. 현재 사정이 그러니까 정식 고소를 한 것이다. 문제 될 것은 받지 마라. 가화가 안 된 사람에게는 받지 마라. 어디 가서 아쉬운 소리 할 것도 없다. 월성은 관계가 없다. (1993. 6.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