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법난도(亂法亂道)
내가 말하는 것이 바로 법(法)이며
내가 정하는 것이 또한 법(法)이니
이 법을 지키지 않으면 문란해지고
그것이 곧 난법난도이다. (1990. 윤5. 22)
우리의 법은 도주님께서 상제님의 모든 것을 받들어 정하신 것으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법방과 제도인 것이다.
도를 믿다가 우리 법에 어긋나거나 법을 바꾸려고 하면 탈법이 되고,
탈법을 난법난도(亂法亂道)라고 한다. 그
런 짓을 하는 사람을 난동자라 하는 것이다.
난동자가 난동을 부릴 때 몰라서 그렇게 했다면 큰 것이 아니나,
알고서도 계속 그런다면 나중에 신명한테 벌을 받는 것보다도
사람한테 먼저 벌 받는다. 여기서 쫓겨나간다는 뜻이다.
악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안 쫓아낼 수가 없다. (1991. 2. 20)
종단 안에서 제도에 순종해 나가야지,
종단의 제도와 법을 지키지 않고 마음대로 한다면
난법난도자, 난동자가 되는 것이다. (1991. 2. 20)
도주님께서 상제님의 유지(遺志)를 이어받으시고
50년 공부 종필(終畢)로써 이룩해 놓으신 것이
바로 우리 도의 진법(眞法)이다.
진법을 따르지 않고 허황된 생각으로 없는 법을 지어 낸다면
그것이 바로 난법난도(亂法亂道)가 된다.
이는 도에 대한 믿음의 부족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명심하고,
비뚤어진 욕망에 빠져 마음을 바로 하지 못하면
이런 함정에 스스로 빠질 수 있음을 항시 경계하고
수도 생활을 잘 해 나가야 하겠다. <대순회보> 81호, 청계탑
도전님께서 있는 법을 고치고 없는 법을 만드는 것이
‘난법난도(亂法亂道)’라 하셨습니다. <대순회보> 164호, Q&A 게시판
성·경·신 3요체 중에서도 믿을 신(信) 자 으뜸이니
매사에 믿음이 없으면 만사불성(萬事不成)이다.
도전님께서도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 하시며
“수도자가 믿음이 부실하면
결과적으로 난법난도자가 된다.”고 강조하셨다.
도를 닦다가 난법난도하는 자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 진속은 결국 우리 도를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도를 진실로 믿는다면
상제님의 밝으심과 천지신명의 미미시찰(微微視察) 아래
감히 난법난도를 자행할 수 없는 것이다. <대순회보> 170호, 지남거
신명공판(神明公判)이란 운수마당에 가서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하는 과정에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업공, 포덕공이 크다 해도
끝까지 따라가는 공이 가장 큰 것이다.
아무리 포덕을 많이 하여 사업공이 크다 하더라도
끝까지 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도중에 탈선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대도를 비방하고 연원을 부정하며
도인들의 운수를 그르치는 자들의 전도는
전에 쌓은 공덕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천지공사를 방해하는 죄에 해당하므로
천위신벌(天威神罰)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전경>에 “수운(水雲) 가사에
‘난법 난도(亂法亂道)하는 사람 날 볼 낯이 무엇인가’라
하였으니 삼가 죄 짓지 말지니라.”(교법 1장 33절)하신 말씀과
<채지가>에 “난법난도 하던사람 전공은 고사하고
천위신벌 없을쏘냐”(뱃노래)라는 구절은
다 이들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대순회보> 159호, 뇌화고.
도전님께서 앞일을 예지하시어
“있는 법을 고치고 없는 법을 만드는 것이
난법난도(亂法亂道)이다.”라고 하셨다.
난법난도가 무엇인지 삼척동자도 알 수 있게 말씀해놓으신 것이다.
도전님께서 모습을 감추시었어도 계시는 듯이 수도하는 사람이
바르게 도를 믿고 닦는 도인이다. <대순진리회 약사>
경천은 하늘을 공경하는 것인데,
우리는 그렇게 정의하지 않습니다.
경천이란 <대순진리회요람>에 명시되어 있듯이
“모든 행동(行動)에 조심(操心)하여
상제님(上帝任) 받드는 마음을 자나 깨나 잊지 말고
항상(恒常) 상제(上帝)께서 가까이 계심을 마음속에 새겨두고
공경(恭敬)하고 정성(精誠)을 다하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입니다.
이것이 경천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경천은 막연하게 하늘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빌어 오신 하느님이신 강증산 상제님을
받드는 마음을 자나 깨나 잊지 않는 것입니다.
상제님께서 늘 나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명심하고
성경신을 다하는 마음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잊지 않는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훈회 ‘은혜를 저버리지 말라’에서
저버린다는 것은 잊고 배반함이라 하였습니다.
은혜를 갚지 않는 것은 그 고마움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도를 닦다 낭에 떨어지는 것도
수도의 목적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도를 닦다 난법난도를 자행하는 것도
도의 진리를 망각하고 급기야 도를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종단 대순진리회의 신앙의 대상은 강증산 구천상제님이시고
창도주는 조정산 도주님이시며 영도자는 박우당 도전님입니다.
우리 도(道)배는 도사공 없이 표류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대순진리회의 영도자는 도전님이십니다.
도전님께서 은신(隱身)하셨다 하더라도
종단을 운영하고 도인들이 수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포덕ㆍ교화ㆍ수도 사업을 해나가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도전님께서 나의 말이 곧 법(法)이라 하셨고,
있는 법을 바꾸고 없는 법을 만드는 것이
난법난도(亂法亂道)라 하셨습니다.
도전님께서 난법난도에 대해
“있는 법을 고치고, 없는 법을 만드는 것이 난법난도”라 하시어
삼척동자도 알기 쉽게 난법난도를 정의해 주셨습니다.
도법은 도전님께서 정해주신 법대로 그대로 시행해 나가야 합니다.
해오던 것을 고치거나 없는 것을 만들면 안 됩니다.
판단의 기준은 명백합니다.
‘이것을 누가 만든 것인가?’라고 자문해보면 자명한 답이 나옵니다.
<대순지침>에 “연원은 고칠 수도 바꿀 수도 없다.” 하셨으니,
지금도 앞으로도 도전님의 법을 마음대로 바꾸거나
종통계승 운운하는 자가 있다면 다 난법난도자입니다.
대순진리는 종통을 전제로 하는 진리입니다.
<대순지침>의 첫 장, 대순진리의 바른이해에서
가장 먼저 제시되는 것은 종통에 대한 이해입니다.
새롭게 포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있는 도인을 잘 지키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연원과 공부에 대한 진리를 확고하게 인식시킨다면
흔들림 없는 도인을 기를 수 있을 것입니다.
상제님께서 도를 닦다 ‘낭’에 떨어지면 죽는다 하셨습니다.
도를 닦는 자가 난법난도를 하게 되는 것은
결국 믿음이 부실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상제님의 도를 진실로 믿지 않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대도를 빙자하여
자신의 에고 마음인 사심(私心)을 채우려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의심이 없는 굳은 신념이고,
자각이 없으면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하셨으니,
도를 닦는 데는 진리를 깊이 파서 자각을 높여
확고한 믿음의 길로 들어서야 흔들림이 없습니다.
이것이 대도를 숭신하면서 대순진리를
깊이 있게 아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